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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 산상수훈 팔복 (8복) 율법이 주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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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은 예수의 산상수훈 시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규모는 전보다 방대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치유의 기적을 보고 그분의 강력한 가르침을 듣기 위해 사방에서 왔습니다.

사람들이 ‘자연’ 에 대해 설명하는 데 사용하는 단어는 장소에 따라 크게 다를 수 있습니다. 미국 중서부에서 자란 사람은 수역을 “연못”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중앙 아프리카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호수”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고대 이스라엘에 사람이 ‘산’이라고 불렀던 것을 네팔 사람은 ‘언덕’이라고 불렀을 수도 있습니다.

당시 이루어졌던 예수님의 설교는 에베레스트산이나 로키산맥 같은 높고 험한곳에서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바다의 가버나움에 있는 집 근처 언덕에서 이 설교를 하셨을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 충분한 좌석을 제공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마태복음 5장 : 팔복 (8복) 의미

마태복음 5:1~12 마태복음은 팔복이라고 하는 목록으로 시작합니다. 그 이름은 라틴어 beatus 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는 “축복받은” 또는 “행복한”을 의미합니다. 각 문장은 “축복받은 자들이여”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에서 사용하신 복되다는 것은 “좋은 결과를 얻다”와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행복의 감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유하면 복을 받는다, 착하게 살면 행복하다 라는 세상적인 의미가 아니라는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사실 이러한 내용의 일부는 고통과 고난을 수반합니다. 단순히 인간적인 관점에서 바라봐 볼까요? 예수님께서 언급한 종류의 사람들(참는 사람, 착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등)이 “축복받은” 사람들이라는 말을 듣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실제로 겸손하고 착하게 사는 사람들보다는 욕심을 부리고 남을 밟고 올라가는 사람이 더 잘 살아가는 세상이니까 말이죠. 이러한것은 아마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느나라다 다를것이 없었을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설교는 듣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정상적인” 관점이 거꾸로 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겸손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사람이라면, 잠시 잠깐이지만 이땅에서도 그에 합당한 마음과 행실로 살아가야 하는것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5장 : 생명, 선한 일

다음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의 생명이 매우 귀중함을 강조하십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선한 일’ 이란세상의 어두움에 있는 자들이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즉, 새롭게 거듭남을 뜻합니다. *이는 단순히 악한 사람이었다가 착한사람이 된다는것을 의미 하는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악인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믿지 않는 사람, 구원받지 않은 사람(천국에 가지 못하는 자)’ 를 의미하며, 선한 자, 의인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 죄에서 구원 받은 사람(천국에 가는 자), 하나님의 자녀 된 자’를 뜻합니다. 등불이 어두운 방에 빛을 비추거나 소금이 음식의 부패를 막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영향력은 악과 절망에 대항하기 위한 것입니다(마태복음 5:13-16).

마태복음 5장 : 율법에 대하여

그런 다음 예수님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님을 분명히 언급 하셨습니다. 그들을 버리러 온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만족시키러 오셨습니다. 그의 사명은 그러한 계명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계명을 완전하고 완전한 목적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예수님은 그 명령이 가지고 있는 더 깊은 의미를 설명하십니다. 이것은 악명 높은 엄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능가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하십니다. 그들의 의는 피상적이며 어떤 사람도 스스로 천국을 얻을 만큼 충분히 선할 수 없다고 말이죠(마태복음 5:17-20). 이말은 결국 ‘아무리 선한일을 많이 하더라도, 아무리 율법을 잘 지키더라도, 아무리 교회를 열심히 다닌다 하더라도’ 스스로 선하게 될 수 없다(의인이 될 수 없다, 거듭날 수 없다, 구원받을 수 없다,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간음에 대하여

예수님의 요점은 하나님의 계명에 벌거벗은 율법주의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각각의 경우에 예수께서는 단지 육체적인 죄를 피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설명하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머리로 하는 생각과 태도는 우리의 행동과 말과 마찬가지로 죄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1) 살인하지 않는것은 여섯째 계명을 따릅니다(출 20:13). 그러나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그 계명을 진정으로 따른다는 것은 불의한 분노를 품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인간적으로 바라본다면 분노는 살인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마음속으로 화를 내고 미워했다고 세상법정에 서지는 않죠. 하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미워하는 마음’ 또한 살인의 죄라고 보십니다 .

예2) 일곱째 계명은 간음하는 것을 금하지만(출 20:14), 하나님은 단순히 육체적인 행위를 피하는 것 이상의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사용하신 표현은 능동적인 생각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다른 사람을 죄에 빠지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음탕한 생각은 육체적인 간음과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모든 면 에서 죄가 됩니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예수께서는 우리의 충동의 위험성에 대해 의도적으로 과장된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의 타고난 본능이 우리를 지옥으로 끌고 가게 놔두는것보다 불구가 되거나 눈이 멀게 하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십니다(마태복음 5:27-30).

이혼에 대하여

당시 이혼은 매우 느슨한 제한을 받았습니다. 실제로 남자들은 거의 모든 다양한 이유로 아내를 내칠 수 있었습니다. 이혼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은 그분의 승인의 표시가 아니라(신명기 24:1~4), 부당한 대우로부터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적 부도덕과 같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혼이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심으로써 결혼에 대한 이기적인 태도를 갈가리 찢으셨습니다. 결혼은 겉옷처럼 쉽게 입고 벗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성한 의미를 가지며 그에 합당하게 취급되어야 합니다(마태복음 5:31~32).

서원, 맹세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또한 무의미한 맹세(서원)를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결혼 서약, 법정 서약 또는 계약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구약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을 허용했지만 “I swear by…” (레위기 19:12),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종종 나중에 위반한 것을 변명하기 위해 더 작은 것에 맹세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하나님께 맹세” 또는 “하늘에 맹세” 같은 말을 추가하여 약속이 진심임을 보여줍니다. 다른방향으로 본다면 이것은 그 사람의 말이 항상 신뢰할 만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맹세가 악하다고 말씀하십니다(마태복음 5:33-37).

보복, 원수에 대하여

그리스도는 또한 구약의 보복의 법을 언급하셨습니다(신명기 19:21). 이는 처벌을 범죄와 동일하게 유지함으로써 갈등이 통제 불능 상태가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문제에 있어서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에게 “균등”보다는 평화를 구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모욕과 학대를 받는다면 무시하거나, 공격자가 기대하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랑과 봉사로 보답해야 할것을 명하십니다. 이것은 심지어 우리를 미워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사랑을 나타내고 기도하는 것까지로 넓어집니다(마태복음 5:38-47). 그리스도인 이라는 이유로 핍박을 당하고 계신가요? 상대방을 위해 기도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는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일이라는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려는 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마지막 요구는 무엇보다도 가장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온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온전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명의 깊이를 설명할 뿐만 아니라, 믿음과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마 5:48)으로서 예수님의 복음 전파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게 됩니다.